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30) 김 효성 목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뉴피플신학대학 댓글 0건 조회 3,487회 작성일 22-08-10 21:15 List 본문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의 예 (30) 김 효성 목사 [이 내용들은 기존 교단들 속에 얼마나 자유주의 신학이 깊이 뿌리 내렸는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바른 신앙에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 이 덕재] 4. 창조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6.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성경적 반박) 넷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창조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예를 들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조는 그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 이야기들에서 순수한 전설(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418) [바르트는 사가(saga)에 대해 설명하기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하였다.419)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같은 개념이다.] 또한, 씨 에취 다드(C. H. Dodd)는 “비록 바울에게는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라고 말한다.420)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도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라고 말한다.421)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라고 말한다.422)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겠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믿는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영감(逐字靈感)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423)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이 흙 한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설화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의미 있을 뿐이다.424) 또한,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모든 피조물의 미래가 보편적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현재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저의 미래이었고 선사(先史)시대의 도마뱀의 미래이었고 약 10조년 전 최초의 물질과정의 미래이었다.425) <성경적 반박>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내용이 아닌가. 창조를 부정하면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다음 몇 개의 기본적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천지 창조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며 교리의 첫 번째 지식이다. 천지 창조를 믿지 못한다면 성경의 나머지 중 어느 것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전글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의 예 (31) 김 효성 목사 22.08.16 다음글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의 예 (29) 김 효성 22.08.04